제 6 편 경주 역사 지구

2000년, 유네스코는 경상북도 경주시를 ‘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습니다.
유네스코가 도시 전체를 세계유산으로 정한 이유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간직됐기 때문입니다. 기원 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천 년 왕국을 이뤘던 신라의 수도, ‘경주’는 국보 22점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도시 전역에 있습니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경주역사지구’를 유적의 성격에 따라 5곳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는 신라 불교 미술의 보고, ‘남산(南山) 지구’입니다.
경주 남쪽에 솟아있는 ‘남산’은 해발 494m의 낮은 산입니다. 하지만 골짜기가 깊고, 능선이 변화무쌍해 신라인들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백성을 지켜주는 신이 ‘남산’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특별한 믿음의 공간이었기에 신라인들은 불교가 공인된 6세기 무렵부터 ‘남산’ 골골에 절을 세우고, 봉우리에 탑을 쌓고, 바위를 다듬어 부처를 새겼습니다. 오늘날 확인된 절터만 해도 150여 곳! 탑은 100여 기, 불상은 100여 체에 달하는 ‘남산’은 다채로운 불교 유적을 만날 수 있는 거대한 예술관입니다.

두 번째 ‘역사 지구’는 신라 천년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月城)’입니다.

“신라 5대 파사왕 22년. 봄 2월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고,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가 살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월성’은 101년, 축성을 시작해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 궁성의 역할을 했습니다.
신라 천 년의 유구한 역사 동안 정치 중심지였던 ‘월성’은 56명의 신라 왕 중 38명을 배출한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숲인 ‘계림(鷄林)’! 신라 왕궁터! 별궁인 '임해전(臨海殿)'! 동양 최초의 천문시설, ‘첨성대(瞻星臺)’가 있습니다.

세 번째 ‘역사 지구’인 ‘대릉원(大陵苑)’은 신라 왕과 왕비, 귀족들의 고분군 분포지역입니다.
대릉원’이라는 이름은 “신라 13대 왕인 미추(味鄒)왕을 대릉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곳에는 ‘미추왕릉’! 신라 무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황남대총’! ‘천마총’ 등 23개의 크고 작은 고분이 모여 있습니다.
신라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나가는 5~6세기, 축조된 이 고분 안에서는 신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등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됐습니다.



네 번째 ‘역사 지구’는 신라 불교의 정수, ‘황룡사’입니다.

“층층 계단은 빙빙 둘러 하늘에 나는 듯
일만 강과 일천 산이 한 눈에 들어오네.
굽어보니 수많은 경주의 집들이 벌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고려의 문인, 김극기가 황룡사 9층 목탑에 올라 지은 시, <황룡사>는 553년 착공해, 645년 완공한 신라의 호국 사찰! ‘황룡사(皇龍寺)’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케 합니다.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됐지만, 6만 6천여㎡의 경내, 82m 높이의 9층 목탑, 108t의 대종! 모든 것이 장대한 ‘황룡사’는 신라 최대 사찰로 ‘황룡사지’가 보존되어 있는 ‘황룡사 지구’는 신라의 저력과 위상을 보여줍니다.

다섯 번째 ‘경주역사지구’는 방어 시설의 핵심, ‘산성(山城) 지구’입니다.

“장군~ 우리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바다에서는 왜적이 호시탐탐~ 노략질할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시설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지당한 말씀이요~ 우리 신라는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니 산성을 쌓는 게 어떻겠소? 서라벌 외곽에 산성을 만들면 왕경(王京) 방어에 도움이 될 것이오~”

한반도 패권을 놓고 삼국이 경쟁하던 시대. 신라는 경주 외곽에 ‘명활산성(明活山城)’, ‘서형산성’, ‘남산성’, ‘북형산성’을 쌓았습니다.
이 중 400년 이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은 6km의 둘레와 이중 구조로 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있어 경주 수호에 큰 역할을 한, 당시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라 천 년의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경주역사지구’. 도시 곳곳에 신라의 숨결이 흐르는 이 곳은 살아있는 역사 박물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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