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우수성

정조의 효심이 만들어 낸 도시, 화성

정조는 왕위를 계승한 후 사도세자에게 장조라는 임금의 칭호를 주고 그 묘를 조선 최대의 명당인 화산으로 옮긴다.
정조 18년(1794)에 축성을 시작해 1796년에 완공된 수원 화성은 비통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하는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기본이 됐다.
또한 화성은 강력한 왕도정치 실현을 위한 정조의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겨 있는 구심점이자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군사적 요지이기도 하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참조: 장헌세자영우원천봉도감의궤

동서양 축성술의 결정체

화성은 조선 후기에 발달한 실학이 꽃 피운 건축물이다.
실학은 유학이 지나치게 예법이나 형식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면서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과학과 같은 학문을 중요시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은 동·서양 도시의 장점을 접목하기 위해서 서양의 도시를 소개하는 서적을 섭렵하고, 도르래의 원리로 거중기와 녹로를 고안하는 등 최첨단 기계들을 동원해 10년으로 예정됐던 공사 기간을 2년 9개월로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 거중기

  • 녹로

출처: 문화재청

18세기 최첨단 전투요새, 화성

화성은 기존의 성곽 체계를 탈피한 최첨단 방어요새다.
화성에는 다양한 군사용 장치들이 있는데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4개의 성문은 바깥으로 반원형 모양의 성벽인 옹성을 세우는 이중구조로 지어졌다.
공심돈은 벽돌을 원통형으로 쌓고 그 속에 수 십 개의 총구와 포구를 설치해 동시에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석재를 지그재그 형식으로 맞물리게 쌓아 화포의 공격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게 축조하였다.

공심돈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

정조는 개혁 시범도시로 화성을 건설한 후 화성 성곽 밖에 생산 기반 시설로서 국영 시범농장을 설치하고, 성곽 안 신도시 내에는 국제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국제무역시장과 전국적인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큰 규모의 시장을 설치하였다. 또한 화성 축성에 있어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강제 부역이 아닌 일한 만큼 품삯을 지급한 형식으로 노동력을 동원했는데 이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

자연친화적인 건축물

‘꽃의 성’ 이라는 이름의 화성.
그 이름에 걸맞게 유연성 있는 곡선미를 자랑하는 화성은 성곽과 주변에 세워진 모든 시설물들이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어진,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산과 내와 천을 그대로 연결시킨 친환경적인 건축물이다.

출처: 문화재청

  • 화성 건축의 종합 보고서, 화성성역의궤

    화성은 축조의 모든 과정이 기록돼 있다.
    설계부터 완공까지 동원된 인부수와 그들의 출신지, 총 소요자금, 나무와 돌의 출처, 사용기계, 건축방법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화성성역의궤>가 그것으로 화성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는 2007년,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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